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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제주 봄 여행

bigbeacon 2025. 3. 7. 15:08

제주의 봄을 즐기러 가자!

고3 친구들 7명이 의기투합하여 제주 민박집을 1년간 연세(年稅)로 계약했다.
제주도에 4년째 정착 중인 친구부부가 아름답게 살고 있는 모습도 부러웠고, 간간이 들려주는 속살 깊은 제주생활에 공감하는 7인방이 작년 말에 사전답사를 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도시에서 일과 스트레스로 찌든 심신을 달래기에는 제주도만 한 휴양지도 없지 않은가?

7인의 친구들 직업도 다양해서 의사, 법무사, 교수, 사업가로 구성되었기에 선착순으로 미리 일정을 선점하면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었다.
우선 1년을 이용해 보면 앞으로의 방향성이 결정되리라.

출발 전인 4월 13일은 초등학교 동창회가 있어서 전주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리다 새벽에 귀가하였다.
14일 일요일 아침, 부랴부랴 캐리어에 짐을 꾸겨넣기 시작했다. 서둘러서 잠그다 보니 지퍼가 오래돼서 끊어졌다. 일단 끈으로 급하게 대응하였다.

택시로 9호선 석촌역까지 가서 전철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오랜 직장생활 덕분에 쌓인 항공사 마일리지로 특별 수속을 밟아 순조롭게 안내받고 검색대를 통과하는 와중에 갑작스럽게 모르는 전화가 계속 걸려왔다. 검색대를 통과해서도 계속 걸려와서 받아보니 항공사에서 짐으로 부칠 수 없는 물건이 발견됐다며 다시 밖으로 나가보라고 한다.
아내의 캐리어에 넣은 짐이 많아서 설마 내 문제는 아닐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나가서 확인해 보니 내 짐에 문제가 있단다.
보안원의 지시로 짐가방을 열어보려는데 아침에 맨 끈이 작동을 안 한다. 간신히 열었더니 보조배터리 문제였다. 이것은 탑승 소지품으로 갖고 갔어야 했는데 무심결에 짐으로 부쳤으니 적발된 것이었다.
어떤 젊은 커플도, "그러게 내가 이 보조배터리는 넣지 말자고 했잖느냐"면서 언성 높여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저들은 여행지에서 화해를 하고 돌아올까?

간신히 재검색받고 들어와서 라운지에서 요기를 했다. 직원도 1명으로 줄어있고 컵라면도 없지만, 라테와 당도 높은 과자로 10분 만에 얼른 먹어치웠다.
탑승하자마자 바로 눈을 붙였다.

한 시간을 비행하고 내려서 제주공항의 롯데 렌터카를 찾아 미리 예약해 둔 차를 타고 동문시장부터 가본다. 재래시장에는 다양한 먹거리와 전 세계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반찬거리, 과일, 채소, 빵류를 사며 한 바퀴 돌아본다. 시장 일을 마치고 숙소로 향한다. 민박집주인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며 무거운 캐리어를 직접 들어주고 계단을 오른다. 숙소는 203호로 배정되어 있었다. 간단한 주의사항을 교육받고 방을 둘러보니 완벽한 구조이다. 깔끔한 정리정돈, 정확한 분리수거, 주인장의 넉넉한 인심이 묻어나는 민박집이다.


1주일 전에 계약도 할 겸 골프도 칠 겸 첫 방문을 한 친구부부의 상세한 안내문이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삼성그룹 출신은 자료 작성 하나도 남다르다.

조금 뒤에 우리에게 민박집을 소개해준 친구부부가 오고, 이 친구에게 최초로 소개해준 205호 형님네 부부도 만나 환담을 나누었다.
우연히 골프를 치다 만난 사이였는데, 알고 보니 부인끼리 여고동문이어서 서로 언니 동생하는 사이가 되었단다. 내 여동생도 친구 부인과 동창이어서 세상은 좁디좁았다.

지은 지 4년 된 성읍민속마을에 위치한 2층 민박집에는 정말 없는 게 없다. 마치 레지던스 호텔을 방불케 하는 시설과 안락한 침구류, 호젓한 주변 경관은 딱 우리 취향이었다.
노트북을 가져왔으니 틈틈이 업무도 볼 수 있는 와이파이 환경이었다.

민박집 1층에는 끌리네오 돈가스집이 있는데 주인장의 친구가 사장이고 저녁에만 영업하는데 제법 먹을만하단다.

친구부부와 숙소 인근의 부뚜막식당으로 가서 갈치조림 정식을 먹는다. 통통한 통갈치구이와 조림에 한라산 소주 한 병을 곁들인다.
4년째 정착 중인 친구는 이젠 여기가 고향인 듯 제주에 애착이 있고 달통해 보인다.

15일 월요일은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비 오면 운치 있는 여정을 떠나면 된다.
한라산 자락인 사려니숲길로 들어서서 빽빽한 삼나무숲길을 거닌다.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태곳적 신비가 간직되어 있고 빗방울이 이끼에 스며드는 모습을 보며 인생을 생각한다.


코시롱보리빵에 들러 보리빵 다섯 종류를 넉넉히 산다. 여기 보리빵은 팥이 너무 달지 않아서 아침식사로도 좋다.

우리는 교래퐁낭으로 옮겨서 퐁낭쌈정식을 먹어본다. 흑돼지 수육에 멜젓(멸치젓)과 마늘을 넣어 쌈으로 먹는 요리인데, 몸국(돼지 사골육수에 모자반을 넣어서 푹 끓인 것)으로 입맛을 돋우지만 취향이 맞지 않는 여성들은 덜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11시 넘어서 갔는데도 듬성듬성 손님들이 있었고 12시쯤에는 단체손님들이 들이닥쳤다.


오후에는 금호리조트 옆 바닷가 카페 Moat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기로 한다.
안도 다다오 양식풍의 물 있는 정원과 동백꽃 울타리를 음미하며 커피를 마신다.


비가 멈추고 햇살이 뜨거워지자 큰엉해안경승지로 이동한다. 삼나무 참식나무 후박나무 뽕잎피나무가 즐비하다.


큰엉해안경승지에는 한반도 모양의 숲을 배경으로 한 포토존이 있어서 인증숏을 찍었는데 인스타 좋아하는 사람들은 인생샷을 건지기에 좋겠다. 제주 올레길을 걷다 보면 해안가에 밀려오는 파도의 포말이 부서져 하얀 아이스크림 녹은 모습이 연출되는 장관을 목격할 수 있다. 연신 핸드폰 카메라를 찰칵거리는데 어느 것 하나 작품 아닌 것이 없다.


다음 코스는 소천지암으로 향했다. 백두산 천지를 연상케 하는 화산재가 비산 되어 만들어낸 절경인데 바위 끝자락에는 전문 낚시꾼 강태공이 위험한 바위 위에서 세월을 낚고 있었다.


도중에 애지중지하던 팔찌를 잃어버렸다. 날씨가 더워서 웃옷을 벗다가 소매에 걸려서 허공에 날아갔네...
제주에 내 흔적을 남기고 간다.
아내는 셀카봉 리모컨을 분실했으니 피장파장이다.

제주의 물가도 만만치 않아서 저녁은 숙소에서 해결하기로 한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노트북을 켜고 부지런히 이메일을 확인하고 업무 타임을 갖는다. 힐링하러 제주까지 와서도 일을 하느냐는 아내의 핀잔을 뒤로하고 손가락은 분주히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이제 의미 없는 일들은 줄여나가야겠다.
눈이 피곤해서 시계를 보니 12시가 훌쩍 넘어있다.

16일 화요일에는 고사리 따기 체험을 해보기로 한다.
이미 달인의 경지에 오른 친구부부가 8시까지 와서 기다리다 같이 고사리를 찾아보자고 한다. 주로 도로변에 차량이 정차해 있는 곳은 거의 다 고사리 따는 장소라던데 주로 찔레 꽃밭 근처에 많이 분포한다고 한다.


고사리는 찔레 꽃근처 덤불숲 근처에 많으며 약간 응달진 곳 근처에 서식한다.
비슷하게 생긴 고비와 혼동하기 쉽다.
지천이 고사리밭이다는 말은 어불성설이고,
띄엄띄엄 눈에 띄는 정도이다.
멀리 서는 보이는데 막상 가보면 없고, 앞에서는 보이지 않았는데 뒤돌아보면 보인다.
재미로 따는데 2시간이면 충분하고 허리도 아프니 쉬엄쉬엄 해야 한다.
찔레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요즘은 애벌레가 많으며 햇살이 뜨거우니, 창 넓은 모자에 긴팔 허드레 옷, 장화, 장갑, 자외선 마스크, 선크림, 선글라스는 필수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이미 많이 채취했다는 증거이니, 인적 드문 너른 들판을 찾을 것을 추천한다.
우리는 세성로 31길 근처의 서식지를 발견했다.
고개를 쳐들고 있는 사람은 아직 따지 못해 서성이는 모습이고, 앉아서 두리번거리는 사람은 열심히 따고 있는 모습이다.
보이는 사람 눈에만 보이고, 식복이 있어야 잘 보인다고 한다.
부부가 같은 지점에서 출발했는데 고사리 따다가 서로 헤어지기도 한단다. 보물찾기 하듯이 하나씩 찾아내는 게 너무나 재미있고 어린 고사리를 따면 똑똑 소리도 흥미롭다.
나무젓가락 두께는 작고, 새끼손가락 두께가 좋단다.


어제 동문시장에 가보니 100g에 20000원씩 판매하고 있었는데, 생고사리 10kg를 따면 마른 고사리 1kg 정도라고 하니 부지런히 따야 한다. 충분히 일당을 벌 수 있다.

콩나물처럼 수줍게 고개를 숙인 머리 하나의 고사리가 맛있고, 먹고사리도 좋다. 두툼하게
오염되지 않은 청정구역 제주산 고사리는 자연을 벗 삼아 즐겁게 따면서 얼마든지 하루 일당을 벌 수 있다는 기쁨을 선사한다.
고사리는 무침으로 많이 먹지만 생선찌개나 해장국에 넣어 먹으면 일품이다.

친구도 프로지만 부인은 고사리가 있을만한 곳을 척척 찾아냈으니 섬세한 여성의 감각은 엄지 척 이었다. 우리는 프로 부부를 따라 연신 장소를 옮겨 다니며 초심자로서 모처럼 수확의 기쁨을 누렸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고사리를 맑은 물로 씻고 솥단지에 삶는다.
그다음에는 제주의 맑은 햇볕을 받게 해 주며 바람에 말리면 되는데 한나절이면 바짝 마른다.
205호 형님네 부부와 마침 들른 주인장이 훈수를 두면서 씻고 삶고 말리는 과정을 거들어주는데, 오늘 수확량은 1kg은 안 될 듯하다.


점심은 민박집 근처의 백 년 해장국집에서 순두부시래깃국과 추어탕으로 한다. 205호 부부를 모시고 친구 부부와 함께 가서 맛점을 한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오후에는 김창열미술관에 가서 물방울과 그의 인생을 느껴본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가와 그의 작품을 여행지에서 만나보니 색다른 기분이 든다.
서예를 배우다 회화를 접한 작가는 파리유학 중에 현지 신문지 위에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천자문 위에도 그렸다.
물방울이라는 소재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소재로 어떻게 감동을 주느냐가 중요하다는 작가의 말이 그의 작품 세계를 대변하고 있었다.

특히 실감 체험관에서 물방울 안에 투영되어 비치는 내 얼굴이 인터렉티브 한 모티브를 발산하였다.


미술관을 나선 이후 해안도로를 따라 싱게물에 가서 풍력발전기를 배경으로 산책로를 거닐었다. 노천에 남탕 여탕이 있다는 게 흥미로웠는데 용암의 흔적이 해안가까지 남아있는데 바다목장으로 연결되는 다리까지 거닐지는 못해서 유감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저녁식사 장소를 물색해 봤다. 흑돼지? 해산물? 근처 모슬포항 맛집을 검색하다 얻어걸린 고등어 전문 미영이네 식당이 눈에 띄었다. 예약도 받아주지 않아서 대기하고 들어갔는데 맛이 끝내주었다. 온갖 유명인의 사인지가 즐비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2인분에 6만 원이라 좀 가격이 세다는 느낌이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고등어회는 먼저 쌈장에 찍어먹고 김 위에 고등어밥과 회를 올려먹기, 채소 올리고 쌈장이나 갈치속젓 곁들여먹기, 마지막으로 먹는 고등어탕으로 마무리한다. 특히 고등어탕은 칼칼하고 시원한 보양식이었는데 이 집이 왜 유명한 맛집인지 알게 해 주었다.


숙소로 돌아와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내일 돌아가기 위한 짐 싸기를 시작했다.

17일 수요일은 일찍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싸서 백약이오름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15분 거리였는데 서귀포시 표선면의 오름 주차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백약이오름은 약초가 많이 나서 이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오름 군락지의 도로변에 있어서 접근성이 좋다. 357m의 얕은 오름을 계단 따라 올라서 먹는 아침식사는 최고였다. 이른 아침의 산기운, 멀리 보이는 한라산과 풍력발전기, 발밑에 숲을 두고 비행기를 벗 삼아 한입 베어무는 사과한 쪽, 조립식 의자에 앉아 만끽하는 여유로움 속에 짧은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숙소로 들러 짐을 싣고 제주공항에 도착하는 발걸음은 아쉬움의 무게만큼 무거웠지만 6월에 다시 방문하기로 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