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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

bigbeacon 2025. 3. 9. 16:26

- 동전 속에 담긴 시간

책상 서랍을 열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동전들이 빛바랜 저금통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둘 꺼내어 보니 저마다의 얼굴을 하고 있다. 1원짜리는 보이지 않고, 5원짜리는 딱 하나. 10원, 50원, 100원짜리는 수북하게 쌓여 있다. 연도별로 정리하며 동전을 하나씩 손끝으로 굴려보다가 문득 세월이 스며든 기억들이 떠올랐다.

가장 오래된 동전은 1972년의 10원짜리였다. 다보탑이 정교하게 새겨진 이 동전을 보니, 초등학교 5학년 때의 내가 떠올랐다. 전교 어린이회장단 자격으로 다른 학교에 방문했던 기억. 낯선 교정의 풍경과 쑥스러워하던 아이들, 그리고 그해의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국민소득’이라는 구호가 곳곳에 나부꼈던 시절이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둔 1979년의 동전을 보며 고3 시절의 10.26 사태를 떠올렸다. 나라 전체가 충격에 휩싸였던 그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긴급 뉴스의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방송에서는 하루종일 장송곡이 흐르고 우리는 대학입시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1979년과 1981년 사이에 비어있는 1980년의 50원짜리. 벼 이삭이 그려진 이 동전은 광주의 그날만큼 텅 빈 마음을 담고 있다. 텔레비전에서는 ‘소요 사태’라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역사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100원짜리 동전은 1983년부터 있었다. 세종대왕의 늠름한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 동전이 가장 많다는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자주 쓰였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요즘엔 100원짜리조차 손에 쥘 일이 거의 없다.

넷플릭스의 범죄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  주인공 킬리언 머피가 동전을 던지며 운명을 점쳤듯, 나 또한 친구와 함께 동전으로 진학을 결정하기도 했다. 예컨대 100원 숫자가 나오면 등록금이 많이 드는 사립대에 지원하고, 세종대왕이 나오면 공부하라는 의미이니 국립대에 진학원서를 낸다는 식이었다. 그 선택을 따른 것은 커다란 실수로 끝났지만 훗날 그 결과는 하늘의 뜻에 따라 순리대로 이루어졌다. 동전으로 인생을 저울질하다니... 무모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던  시절이었다.

1993년의 500원짜리를 손에 들었다. 비교적 최근 동전 같았지만, 벌써 30년도 넘었다. 500엔과 비슷하게 생겨 일본 자판기에서 많이 발견되었다던 얘기가 떠올랐다. 500원짜리는 동전 중에서 가장 가치가 크지만, 정작 수량은 적었다. 마치 우리 인생에서 값진 순간들이 많지 않은 것처럼.

동전들을 연도별로 나열해 보니 내 삶이 한눈에 펼쳐지는 듯했다. 대학 졸업하고 기자시험 치러 다니던 1986년의 아시안게임. 임춘애가 라면 먹고 뛴다는 기사를 보고 모두가 놀라던 기억. 입사 후 종로에서 넥타이부대로 최루탄에 쫓기던 1987년의 6.29 선언. 중국 지사장으로 부임하고 고량주에 시달리다 위안을 삼던
2002년 한일 월드컵. 거리마다 울려 퍼지던 응원의 함성이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대~한~민~국! 짜자짝 짝짝!

동전은 단순한 화폐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작은 역사 조각이었다.

이제는 카드와 앱으로 결제하는 시대. 지폐조차 손에 잡을 일이 드물다. 언젠가 동전도 박물관 유리장 속에 갇히게 될까? 그래도 오늘, 나는 손바닥 위에 올려둔 작은 금속 조각들을 보며 한 시대를 살아왔음을 느낀다.

내 손 안에서 반짝이는 이 작은 동전들이 나를 과거로 데려갔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게 한다.

책상 서랍을 정리하면서 잠시나마 시간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한 개의 동전이 이렇게 많은 기억을 품고 있다면, 우리의 삶도 결국 수많은 조각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