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도쿄 여행기
모처럼 출장 아닌 여행으로 도쿄를 방문했다.
성탄절 징검다리 연휴를 낀 3박 4일의 짧은 일정으로, 가족과 함께 초 경제적인 여비를 사용하는 문화 탕방이 주목적이었다.
20대에 연수한다고 생활했었고, 출장으로 수십 번은 다닌 도시이지만, 늘 공항 호텔 회의실 사무실 식당과 술집만 다니느라 낮 시간의 한가로운 유유자적은 꿈도 못 꾸었던 터라 내게는 한 해도 뒤돌아보는 좋은 기회였다.
늘 편하게 다니다 갑자기 전철 패스로만 움직이는 워킹투어에 적응이 쉽지 않다. 매일 2만 보는 걸어보리라.
첫날은 시나가와(品川) 근처 호텔에 체크인하고, 오래된 지인을 만나 사케를 곁들여 저녁을 같이 한다. 연말이라 500석의 자리가 만석이다.
본사 OB인 그는 60세를 마지막으로 미련 없이 퇴직하고(일본 직장인 정년은 65세), 회사를 창업하여 자신의 업무 경험을 살려 현장을 누비고 있다. 아직 창업 3년 차에 매출은 제로이지만, 사업 가능성을 보고 몇몇 잘 나가는 선배들이 출자해 주고 빌려주는 등 지원을 받아 우선은 목구멍에 거미줄을 치고는 있지 않다고 한다.
일본은 샐러리맨 출신의 용감한 창업자들이 많고 또 그런 소규모 비즈니스가 가능한 기반과 환경이 부럽다.
그는 한중일을 엮는 의료 비즈니스를 추진하고 있다. 이름하여 스몰 글로벌이다.
이튿날엔 도쿄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 두 가족과 점심을 같이 하며 격려해 주었다. 일본인 직원들 틈에서 소수의 한국인들이 이끼나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는 해야 하나, 어찌해야 생존할 수 있는가 서로 지혜를 교환하고 등을 두드려준다.
둘 다 똑 부러지는 사람들이라 행여 직장 내 '이지메(왕따)'라도 당하면 어쩔까 걱정도 했지만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들의 자녀들도 꿋꿋하게 일본인 학교에 다니고 있고, 학교에서 이지메는 없으며 오히려 수줍어하는 일본 애들 틈에서 능동적인 한국 애들이 더 리더십을 보이고 있다니 안심이다.
오후에는 가족들과 함께 유락 쵸(有楽町)에 가서 대기업이 만든 미술관을 방문했다.
네덜란드 필립스 그룹의 창업주가 소장했던 피카소와 마네, 고흐의 그림과 로댕의 조각 등등, 비공개 작품들이 전시된 갤러리를 돌아보며 우리보다 훨씬 나은 문화적 환경에 질투하는 나를 발견한다.
우리에게는 기업의 미술관도 적지만,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명화를 모셔와서 전시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 아닌가?
기획력과 자금력, 협상력이 대단하다.




밤에는 이자카야(居酒屋)에서 시샤모 구이와 꼬치, 어묵, 해산물과 육류를 곁들여 저녁을 즐긴다.
일본 맥주가 혀에 감긴다.
우리 맥주보다 더 맛있다.
길가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돋우는 꼬마전구 트리가 정갈하게 꾸며져 있다.
20대 여성들이 엄청나게 몰려나오는 것을 보니 근처에서 큰 이벤트가 있었나 보다.


셋째 날 오전에는 긴자(銀座) 거리를 거닐며 초밥(寿司)으로 허기를 달랜다.








즐비한 유럽 명품관 속에 당당히 자리 잡은 일본 고유 브랜드들, 쇼핑몰의 화려함과 섬세한 디스플레이, 쇼핑몰 옥상의 휴식공간, 그 안의 스타벅스에서 즐기는 여유, 한 층을 다 쓰는 엄청나게 큰 서점 속에 셀 수없이 많은 전통 문구류와 첨단 IoT의 활약을 보며, 어떻게 신구를 조화시키는지 감탄한다.
일본의 야구 영웅 이치로가 술 선전을 하는 간판도 보인다. 40을 훌쩍 넘은 그는 내년에도 현역을 선언했다.




저녁은 에비스(恵比寿) 역으로 향한다.
삿포로 맥주 공장이 있었던 곳을 개조하여, 프리미엄 에비스 맥주를 기념한 박물관과 전시관, 전망대와 오피스 빌딩 숲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기업이 문화 사업을 하며 사회 공헌을 하면서 어떻게 또 다른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하고 있는지 그 주소를 알게 한다.



돌아오는 전철 속에서는 아직도 책을 손에 쥐고 있는 구세대 일본인들과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신세대를 만난다.
시나가와 역에서 산 크로켓을 주식으로 맥주를 곁들이면서 훌륭한 객실 내 디너를 만끽한다.
막간을 이용하여 2시간 동안 빠찡코에 빠져 최근에 바뀐 기종이 뭔지 살펴보고, 어디가 터지는지 옮겨 다니다 기어이 대당첨(大当たり)의 행운을 맛본다.
넷째 날은 아침 일찍 도쿄 정원공원으로 향한다.
메구로(目黒) 역에서 은행잎이 깔린 포도를 거쳐간 곳에는, 파아란 하늘과 단풍잎으로 물든 연못, 거목들로 둘러싸인 정원이 있고 잉어가 유유히 노닐고 있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30년대의 황족이 거처하던 공간이 전시관이 되어있다.
동시대에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지배했던 프랑스를 모방하여 온갖 럭셔리한 사치와 탐욕이 지배했던 일제 황실을 구경해 본다.
그 당시의 우리 선조들은 어떤 일을 겪고 있었는가?






한쪽에선 군대를 앞세워 살육을 일삼고,
한편에선 예술을 표방하며 사치를 구가한 이중성에 할 말을 잃는다.
오후 출국 시간을 의식하며 점심시간에 호텔로 돌아와 체크아웃하고 하네다(羽田) 공항으로 향한다.
국적기보다 값이 싸서 예약한 일본 항공기는 곳곳에 최첨단 기술의 흔적이 나의 기를 죽인다.
역사적으로 불편한 감정이 가장 큰 일본,
그런데 물건은 일제를 좋아하는 이중성이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30여 년 전 그 모순을 타개하러 기업에 입사했으나 지금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음에 아직도 난처한 경우가 있다.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생각해 본다.
최근 그들의 자신감은 회복된 경제에 있음을 확인한다.
우리가 미워하는 아베는 대졸자들이 서너 곳을 골라서 취직하게 만들었고 죽어가는 기업을 살려놓았다.
아베는, 예전의 수상 시절에는 아마추어리즘으로 실패를 맛봤고, 건강 문제로 쉬었다가 재기하여 다시 수상 자리에 올라서 경제를 부흥시켰다.
우리에게는 아무리 빨리빨리 정신이 있다 해도 5년에 뭐 하나 이루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짧다. 게다가 대통령 했던 사람이 은퇴 후 쉬었다가 또다시 집권하는 것은 용납이 안된다.
그런데 지극히 보수적인 일본조차도 뭐든 도움이 된다면 재빨리 도입하고, 그 사람이 인물이라 판단되면 국민들이 나서서 밀어준다. 그 힘으로 정책을 만들고 나름대로 노선이 있는 외교를 펼친다.
짧지만 많은 것을 느낀 긴 여행이었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김포에 도착한다.
도쿄보다 춥고 거칠지만 역시 내 나라가 좋다.
앞으로는 어느 한 도시를 집중해서 탐방하기로 마음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