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아내의 냉장고

아내는 뭐든지 말만 하면 뚝딱 요리가 나오는 솜씨를 가지고 있다. 냉동실이 꽉 찼을 때 행복감을 느끼고 비어 있으면 불안하다고 한다. 냉동실을 열어보면 들어갈 틈도 없이 꽉 차 있다. 그 속에서 내가 원하는 요리의 재료가 나온다.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이다.

주말 아침 늦잠을 즐기려는데 아침 먹으라는 소리가 들린다. 9시에 먹는 아침식사는 토요일 치고는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아내는 벌써 8시부터 준비했다고 한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요리는 항상 창작을 한다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단다. 있는 재료를 어떻게 조화롭게 구성하여 만들어야 영향학적으로 균형이 맞는지 생각하며 요리를 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가족 중에 당뇨 환자가 있다고 치면 혈당 관리를 위해서 당 지수가 낮은 음식 위주로 구성을 한다는 것이다. 혈당 관리가 잘 되는 것은 아내의 덕택이라고 인정한다.

탄수화물로써 백미와 고구마, 감자를 철저히 억제하고 있고, 내가 좋아하는 단 것들, 예를 들어 단팥빵, 찐빵, 도넛 등은 절대로 못 먹게 한다. 떡, 면, 빵은 우리 집에서 금기식이다. 그러면서 자기처럼 먹으라고 권유한다. 그럴 때면 꼭 저승사자처럼 무서워 보인다.

확실히 아내의 건강검진 결과를 보면, 콜레스테롤이나 혈당치, 혈압 등의 수치가 모두 정상범위 내에 있으니 혈관이 깨끗할 것이다.

아내는 약을 먹으면 바로 약효를 느낄 정도로 반응이 정확한 걸 보면 몸에 바로 흡수가 되는 모양인데 나는 별로 그렇지가 않다.

아내는 지중해식 식단을 선호하며 건강관리와 체중조절에 힘쓰는데, 이것은 그리스의 크레타섬 주민들의 시골식 식사법을 의미한다. 신선한 과일과 채소에 약간의 동물성 식품을 첨가한 식단이 기본이다.

요구르트나 샐러드, 오이, 당근, 견과류, 오징어 등을 재료로 많이 활용한다. 물론 올리브오일로 풍부하게 드레싱을 한다.

아내는 인근의 마트를 수시로 다니지만 가까운 생협에서 신선한 재료를 배달하거나 쿠팡의 새벽 배송도 자주 이용한다.

특히 채소와 신선한 과일은 필요한 시기에 바로바로 주문을 해야 한다고 한다.

아내가 집에 있는 동안은 냉장고가 꽉 차 있지만 보통 일주일 정도 해외에 나가 있는 딸을 만나러 가는 여행으로 집을 비우면 나는 순식간에 냉장고를 비워놓는다.

만들어 놓은 요리 두 칸을 야금야금 먹어 치우니 금방 비워지는 것이다. 아내는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부지런히 냉장고와 냉동실을 채우기 시작한다.

냉장고보다 냉동실이 꽉 차 있을 때 마음이 든든하다고 하며 언제든지 '냉장고 파먹기'를 즐겨한다.

냉장고 파먹기라고 하는 것은 마트에서 사 온 재료를 빨리 소진하여 요리하는 것인데, 보통 냉장고 파먹기에 있어서 채소는 그때그때 사서 공급하지만 냉동식품은 필요할 때만 꺼내어서 조리하여 소진시킨다.

그러면서 왜 남자들은 요리할 마음이 있다고 말만 하면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느냐며 아침부터 힐난조로 추궁을 한다.

분가한 아들도 요리를 배워야 하는데 도통 무관심이라며 투덜댄다.

그리고 모든 재료 준비는 씻고 다듬기부터 시작하는 거라며 당장 오늘부터 요리 만들기에 참여하라고 권유한다.

나는 보통 집에 있는 저녁시간에는 스포츠 중계에 열중하곤 하지만, 아내는 그 시간에 요리에 적극 참여하라고 종용한다. 야구가 밥을 먹여 주느냐, 차라리 맛있는 요리는 당신의 건강에 도움을 주지 않느냐며 TV 중계를 보지 말고 요리에 정성을 다하란다.

요리를 능숙하게 하지 못한다면 우선 보조로 참여하여 아내가 지시하는 대로 재료를 썰고 다듬고 운반하는 역할을 맡기겠다고 한다.

요리보조로 참여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만의 요리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노력해 보리라 다짐한다.